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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홀학산문화원 ‘지역문화예술의 공동체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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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당의 재발견이 문화운동으로 확산되었다

admin 0 5956 2014-01-27 01:28:50

 

70년대 마당의 재발견, 80년대 마당예술의 진화, 90년대 마당문화 물결, 21세기 정보화시대 새로운 마당의 출현... 지난 30여년 마당은 시대의 흐름을 따라 변신해 왔다.

열린 시공간(場)의 특성인 마당정신은 문화 전역에 퍼져나갔다.

전통의 마당에서 꽃을 피웠던 민담, 탈춤, 민요, 판소리, 민화, 풍물, 굿, 놀이 등은 분단시대, 산업화시대, 민주화시대라는 새로운 마당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살아났다.

 

제일 먼저 문학이 변했다. 전통시대의 구비문학 구비문화들이 이론화되고, 재창작되었다. 구비문학을 채집한 조동일은 한국문학사를 새로 썼고, 마당문화가 근거로 삼을 문학이론의 바탕을 만들어 주었다. 김지하는 담시(이야기시)를 중심으로 전통에 기초한 창작시를 써내고, 문학 전반에 새로운 풍류를 불어넣었다. 이후 다양한 문인들이 조직(현재는 민족문학작가회의가 중심)을 이루고, 마당문화에 씨를 뿌렸다.

생활인들은 그들이 만든 시와 이야기와 노래들을 마당판에서 즐겼다. 생활인 속에서도 문인들이 탄생했다.

 

그리고 탈춤이 변했다. 전통 탈춤의 복원과 전승부터 시작되었던 탈춤운동은 창작탈춤운동으로 이어졌다. 탈춤판도 다양한 열린 공간에서 열린 주제를 담아 창작탈춤이 되었다. 당대의 몸짓을 담아 창작춤사위가 만들어지고, 당대의 얼굴을 담아 창작탈이 만들어졌다. 탈놀기(탈쓰고 놀기), 탈춤체조, 탈 쓴 연극, 탈 축제 등 탈이 생활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한두레를 시작으로 탈패는 전국적으로 대학가, 생활현장 여러 곳에서 만들어졌다.

탈춤과 더불어 춤도 마당을 찾아왔다. 전문춤꾼 이애주의 ‘시국춤’을 거리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굿도 마당굿으로 재창조되었다. 놀이적 요소가 강한 마당판은 ‘굿판’으로 불렸다. 굿이 미신이 아니라 ‘집단적 신명’의 하나로 재해석되었다.

 

따라서 노래와 소리가 변했다. 김민기를 중심으로 노래극이 만들어졌고, 노래패들이 대학가를 시작으로 사회 전반에 만들어졌다. 그들이 만든 노래들은 방송을 통해 빠르게 확산되었다. 서양의 음악양식과 마당정신을 결합한 다양한 노래와 노래판이 만들어지는 한편, 전통 소리도 재창조되기 시작했다. 민요보급부터 시작한 민요연구회를 중심으로 창작민요(김영동 등)와 민요판굿(김상철 등)을 창출할 수 있었다.

농악으로 불리던 마당판의 악기와 소리들은 시대에 걸맞게 ‘풍물’이란 이름으로 일반화되었고, 사물놀이로 세계화되었다. 일반적으로 생활현장에서 제일 먼저 만들어지고 제일 오래 지속되는 문화패는 풍물패였다. 처음 전문풍물패가 되었던 풍물패 터울림은 이름도 바뀌지 않고 30년을 맞았다. 마당극의 기법으로 생긴 ‘노가바’(노래 가사 바꿔부르기)는 누구나 즐기는 프로그램이었다.

 

미술도 변했다. 처음 마당판의 무대장치 ( 탈, 걸개그림, 소품 ) 수준에서 시작된 미술의 변화는 미술 양식 전체로 확산되었다. 판화 (오윤, 김봉준 등)에 마당이 도입되고, 판화 보급운동이 일어났다. 만화도 마당정신을 도입했다. 만화가 반쪽이 최정현은 만들기 ‘공방’을 통해 DIY(Do-it-yorself, 스스로 만드는 생활문화) 문화를 보급하는 한편, 고물에 상상력을 불어넣어 화랑이 아닌 다양한 마당판에 전시되는 생활미술들을 선보이고 있다. 전통적인 회화도 원근법을 벗어난 마당그림(신학철, 이철수 등)이 이어졌다.

민화를 기초로 민중미술이 탄생했다.

 

연극은 마당극이란 이름으로 발전했다. 전문연극인들은 마당극 판을 구석구석 벌였다. 마당극을 전문으로 하는 마당패는 극단 현장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 하나둘씩 만들어졌다. 기존연극계에서도 마당극의 기법들을 차용하여 마당놀이, 거리극 등 부분 마당정신을 활용했다. 마당극이 좀더 쉬운 연극과 결합하여 ‘촌극’경연대회라는 옴니버스(연산連山구조, 병풍식) 스타일도 유행했다. 마당극에서 파생된 촌극과 놀이들은 생활현장의 문화로 자리잡았다. 마당극 양식과 마당정신을 수용한 기존 연극들이 만나 ‘민족극’이 되었다.

 

미디어의 발전과 더불어 마당예술 출신들이 영화나 드라마 등 영상예술 분야로 진출했다. 영상물 제작, 다큐멘터리 제작, 영화 기획, 대본 작가, 배우 등 영상예술 전반으로 진출했다. 당대의 현실을 담고, 배우와 관객이 넘나드는 영상 실험이 계속 되었다. ‘신명의 카메라’(장선우 감독), 열린 영화, 대안영화를 시도한 많은 사람들이 마당문화를 영상미디어에 도입했다. 우리가 아는 유명한 영화배우 중에도 마당정신을 예술정신으로 삼는 사람들이 많다. 마당정신에 기초한 방송국을 만드는 시도도 계속되고 있다.

 

마당정신으로 출발한 다양한 장르들은 축제로 종합되어 모두 만났다. 대학가에서 ‘대동놀이’로 공동체 구성원 전체가 함께 노는 축제 양식이 시작되면서, 축제의 이름부터 ‘대동제’가 되었다. ‘대동’은 공동체의 이념이었다. 대동의 이념에 걸맞는 각종의 문화양식들이 융합되면서 대동마당이 열렸다. 단일 양식으로 수용하는 규모(1천명 이내)를 넘어서서, 1만명을 웃도는 대규모 집회들에서도 ‘열린 문화’들이 즐겨졌다.

 

이런 모든 문화양식을 통칭하는 말로 ‘공동체 문화’가 탄생했다. 마당의 발견 이후로 열린 예술, 열린 문화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어 왔다. 문화 혁명에 버금가는 ‘문화운동’이 있었다.

 

분단시대, 민주화 시대, 산업화 시대의 시대상을 담는 그릇으로 시작된 마당문화는 공동체문화로 종합되면서, 다시 새로운 공동체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도시화 세계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전통적 기반의 공동체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 빈 자리를 메꾸기 위해 요즈음 ‘마을’이 새로운 공동체로 부각되고 있다.

마당이 작은 생활문화 공동체였다면, 마을은 규모가 큰 일상적인 생활문화공동체다.

정보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생활공간을 넘어선 네트워크들이 생활 깊숙이 자리 잡았다. 손바닥 안에서 세계의 구석구석과 만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카페cafe' 등은 온라인 속에서도 마당정신을 실현하려는 장의 일종이다.

21세기가 되면서 30년 전의 마당정신은 새로운 과제를 부여안게 되었다.

 

마당패, 마당놀이패, 문화패를 통하여 만들어진 예술과 문화는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예술, 생활문화의 중심부에 이미 자리잡았다. 도처에서 마당의 흔적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마당정신은 대도시 아파트단지, 핸드폰과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장 속에서 변신을 요구받고 있다. 새로운 마당(場)에 걸맞는 마당정신의 새로운 양식화, 누가 어떻게 할 것인가.

공동취재단 하영권/김보경/정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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